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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적

가이드북 소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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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와라 료타/바람이 불지 않는 황혼
  2. 시로가네 르 벨 사쿠야/요새화 작전
  3. 오코상/좋은 날 긴 여행
  4. 나나키 카즈아키/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
  5. 후지시로 나게키/마지막 잎새
  6. 사카자키 유우야/밀회
  7. 이와미네 슈/누각이 사라진 날
  8. 히구레 앙헬/제1의 심판

카와라 료타/바람이 불지 않는 황혼

폐점 시간이 지났으니, 오늘의 아르바이트도 곧 끝난다. 사실은 좀 더 일찍 돌아가려 했지만, 폐점 직전에 라부 씨와 아자미 씨가 오셔서 평소보다 늦어버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 달 드디어 식을 치른다는 것 같다. 나와 우루시하라 씨와, 히요코에게도 부디 와달라고 초대장을 전달하러 온 것이다.
결혼. ……결혼이라.

"수고하셨습니다. 료타 씨. 뒤는 제가 맡을 테니, 돌아가도 괜찮아요. 학생에게 너무 늦게까지 일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저기, 우루시하라씨."
"네, 무슨 일인가요?"
"결혼식…… 이란 건 어떤 건가요.
저, 가 본 적이 없어서, 옷은 어떻게 입어야 좋을까요? 날개를 신경 써서 다듬어야 한다던가? 그리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매너 같은 게 있겠죠?"
"라부 씨는 친밀한 친구만 불러 진행한다고 하셨으니, 긴장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결혼식. 옛날, 우리의 선조도 비슷한 것을 하는 종이 있다는 것 같지만, 인류의 문화를 이은 지금의 새들의 식에는 또 약간 다른 의미가 더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역시, 결혼식을 치르면 세상을 보는 방식도 변하고 그럴까요… 연인 사이와 부부의 차이라고 할까……"
"그렇네요…… 저의 경우엔, 확실히 조금 세상의 색이 달라 보인 듯한 기분이 듭니다."
"우루시하라 씨께도 아내분이 계시군요."
"네, 있었습니다."
"앗… 죄,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부디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누구에게든 언젠가 찾아오는 것이에요."
그래, 언젠가는 찾아온다. 결혼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그 약속도, 어쩔 수 없는 예외가 있다. 『죽음이 가를 때까지』. 그 예외를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아파온다.

"료타 씨는,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분이 있나 보네요."
"...네. 하지만 저는 아마, 그렇다고 생각만 할 뿐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 해요.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건 어떨까요. 지금까지와 같은 매일이 앞으로도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저희는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자들. 다음 바람은 어떻게 붙어올까, 아무도 예상할 수 없어요. 저는 당신같은 젊은 새들에게, 좋은 바람이 불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내 고민은 한 걸음 더 뻗쳤다. 나는 아직, 히요코의 마음을 모르니까.

아아, 우리를 맞이하는 건 대체 어떤 바람일까.

 

 

시로가네 르 벨 사쿠야/요새화 작전

늦어.
나를 이렇게나 기다리게 하다니 그 바위비둘기는 자신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일본은 시간에 엄격한 편이라고 들었는데, 어쩐지 이 학원은 마이페이스를 넘어 우둔한 자들이 많은 것 같다. 이래봬도 국내 톱 클래스의 명문고라는 듯하지만─실제로. 그렇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 편입시킬 리 없다─이 정도 수준으로 톱 클래스라고 당당히 이름을 댄다니, 대체 일본의 교육 수준은 어떻게 된 거냐.

"미안해, 사쿠야. 청소가 안 끝났, 아야! 뭔가 밟았어, 아팟!"
"늦어 카와라, 대체 얼마나 나를 기다리게 할 셈이냐!"
"그런 것보다 이게 뭐야 사쿠야! 뭔가 못 같은 게 떨어져 있는데!"

그토록 나를 기다리게 한 바위비둘기는 학생회실에 굴러 들어오자마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후훙, 걸렸구나.

"마키비시(*닌자가 사용하던 철제 함정. 마름쇠.)라는 것이다."
"왜 학생회실에 마키비시를 둬?! 의미를 모르겠어!"
"유모에게 들었지, 일본에는 가는 곳마다 닌자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이 정도의 함정도 피하지 못했다는 건, 네놈은 닌자는 아닌가 보군."
"혹시 나를 닌자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위해 마키비시를 설치한 거야? 일본을 어떻게 공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뭔가 틀렸어!"
"그래. 나는 아직 이 나라에 대해 자세히 몰라. 그래서 네놈을 불렀다."

쓰러진 바위비둘기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본다. 아무래도 내가 발한 말의 수준이 너무 나도 높아 완벽히 소화하지 못 한 모양이다. 이래서 잡종은 싫다.

"이렇게까지 설명해도 모르겠나? 지금 나는 학생회실의 보안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중이다. 네놈을 조언자로 임명해주지. 영광으로 여겨라."
"엣, 에에…… 나 얼른 집에 가고 싶은데……"

이렇게 나는 현지 주민에게 다양한 일본의 닌자 대비 방어술을 배웠다. 예를 들면 돌담(石垣). 그저 올곧게 높이 쌓기만 해선 안 되는 것 같다. 닌자가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휘어진 구조로 만드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림으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성벽, 아니 성 자체의 발상이 서양과는 근본부터 다르겠지. 정말 흥미로워.

"저기 사쿠야, 이제 됐어? 나도 옛날 문화나 역사같은 건 잘 몰라서 도와주지 못해."
"기다려, 아직 닌자가 무슨 원리로 천장에 붙어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못 들었다고."
"몰라!"

일본조도 모른다는 것은, 아직 숨겨진 비기가 있다는 것이군. 시간을 들여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어.

 

 

오코상/좋은 날 긴 여행

하얗고 팔랑이는 꽁지깃이 끝에서부터 분주하게 흔들린다. 벌써 몇 분째 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걸까?

"오코상, 뭐 해? 찾는 물건이라도 있어?"
"구구~굿! (그렇다궁! 오코상 찾고 있다궁!)"
육상부 부장 오코상(尾呼散) 통칭 오코상(おこさん)은, 동아리방의 찬장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 대답했다.
"뭘 찾는데?"
"구~! (콩이라궁!)"
콩? 늘 먹는 비둘기 콩이려나.
"콩이라면 저기 있어. 늘 두는 곳.
"구굿~구! (아니라궁! 그건 그냥 평범한 콩이라궁!)"
그냥 콩을 찾는 게 아녔냐고! 오코상이 말하는 평범하지 않은 콩이란 뭘까?
동아리 활동을 할 때도 경주비둘기 용의 영양 비둘기 콩만 쓸 텐데…….
"동아리방에 영양 비둘기 콩이 아닌 다른 콩이 있어?"
"구~구! 구구구……! (있던 것 같다궁!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궁……!)"
오코상은 마침내 찬장에서 나와 이쪽을 보았다. 새하얀 깃털에 군데군데 먼지가 붙어 꾀죄죄한 회색
으로 보인다.
"아…… 오코상, 모처럼 예쁜 깃털이 엉망이 되었어. 떼어줄게, 이리 와."
"구~구"

나는 오코상에게 붙은 먼지를 털면서 물었다.
"오코상이 찾는 콩은 어떤 거야? 또 이와미네 선생님이 특별 배합한 걸 받아왔다던가?"
"구구~구! (아니라궁! 보존식이라궁!)"
"보존식……?"
인간인 내가 보기엔 비둘기 콩이란, 애초에 관리만 제대로 하면 그럭저럭 오래 가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콩이란 뜻일까?
"구구구~구! (언제든지 신선하게 캔 포장 비둘기 콩이라궁!)"
"처음 들어! 캔 포장 콩이라니 어쩐지 통조림 같은 느낌이네."
"구~구! (통조림이 아니라궁! 영양 가득가득한 비둘기 콩이라궁! 오코상 어딘가에 넣어두고 까먹었다궁!)"
내용물이 비둘기 콩이라면, 딱히 캔으로 가공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그 보존식은 어떻게 할 거야? 재난 대비 세트에라도 넣어둘 거야?"
"구구구구~구! (오코상 여름방학에 긴 여행을 떠날 거라궁! 한 층 커져서 돌아오겠다궁!)"
"헤에-, 여름방학에 여행을 떠난다니 멋지네! 나도 더위에 지지 않도록 열심히 단련해야지!"
"구구굿~ 구! (예행연습이라궁! 오코상 더 강해져야 한다궁! 여름방학이 끝나면 대결하자궁!)"

오코상의 콧김이 평소보다 힘차다.
나도 이 정도의 향상심을 갖고 단련해야지. ……그나저나 예행연습을 위한 긴 여행이란 건 뭘까? 언젠가 세계 일주 여행이라도 하려는 걸까.

 

 

나나키 카즈아키/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

피를 뽑히고, 깃털도 뽑히고, 오늘은 정말로 피곤하다. 교직원 건강검진이 설마 이렇게 힘든 일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앞으로도 매년 한 번씩 이런 날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져서, 무심코… 잠이… 밀려와…

"일어나세요. 당신 차례입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면, 보건실 안에서 기분이 나쁜 듯이 머리를 내민 바위자고새와 눈이 마주쳤다. 맞다, 마지막으로 문진이 남았지.
"죄송합니다. 오늘은 따뜻하고 날이 좋아서요~"
"됐으니까 얼른 들어오세요."

"당신은"
바위자고새는 사무적으로 진료 카드에 눈을 돌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수면장애를 가진 모양이네요. 그것도 꽤 심각한."
"하아…… 그런가요~"
"자각이 없습니까?"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
"우리 조류는 단기간 내 비정상적인 속도로 뇌를 발달시켜왔습니다. 그 폐해겠죠. 뇌에 어떠한 이상 이 발생해서, 기면증에 빠지는 새도 적지 않습니다. 당신도 그 중 한 마리겠죠."
"그러니까, 뇌의 이상이라는 것은, 그럼, 생명에 지장이 생기나요……?"
"당신의 경우,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입니다. 역에서 수면 발작이 일어나 선로에 낙하. 같은 경우는 있을 법합니다만."
"그렇구나~ 조심할게요~"
시간은 아직 있다. 그렇다면, 괜찮아.
왜냐하면 당신은, 앞으로도 쭉 이곳에서 일할 테니까요. 저는 알아요.
"당신과 같은 질환에는 반 각성이 함께 오기도 합니다만, 그쪽은 괜찮습니까."
"반, 각성......?"
"수면 중 뇌가 부분적으로 깨어나는 상태입니다. 가위에 눌린다고 표현하는 새도 있네요. 환각이나 환청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환자도 적지 않습니다만."
혹시, 나게키를 말하는 걸까. 아니, 아니야. 나게키가 나를 만나러 오는 건 사실이야. 매일 밤 나를 만 나러 와서, 앞으로도 쭉 함께라고, 내게 약속해줘. 내가 썩는 날까지,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고.

안 속아, 이번엔 속지 않아.
당신이 숨긴 나게키도, 돌려받을 테니까.

"문제, 없어요. 스트레스는 받지 않아요. 전혀, 괴롭지 않으니까"
"그렇습니까.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조금 전부터 계속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만."
"아하하…… 저는 늘 이래요~.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겉치레 웃음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제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바위자고새는 담담히 문진표를 써 내려간다.

실은요, 선생님, 저 굉장히 기분이 좋아요. 이 학원은 당신이 있고, 나게키가 있어서, 무척 멋진 곳이지요. 정말로, 집에 돌아가기 아쉬울 정도로.

"마지막으로 뭔가, 질문이나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묻겠습니다만."
"으응…… 그렇네요. 딱히 없어요~"

실은요, 선생님, 저도 선생님에게 여러 가지 묻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접어둘게요.
이래보여도 저는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편이거든요.

그러니, 언젠가 제대로, 제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후지시로 나게키/마지막 잎새

창밖으로 보이는 저 담쟁이덩굴 잎이 떨어지면, 나도 죽게 될 거야.

─바보 같긴. 종이 위 등장인물에게 불평을 말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달리 할 일도 없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나는 책에 둘러싸여 반복되는 나날을 보낼 뿐이니까.

애초에, 이 환자는 자의식 과잉이다. 나뭇잎은 본래 떨어지는 것이고, 그게 자연이다. 일일이 단 한 사람의 상태만을 살피며 흩어질지 말지 결정한다니, 그런 이야기가 있을까. 그녀는, 자신이 세계와 우주의 진리 정중앙에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걸까. 심각한 과대망상이다.

옛날, 위대한 사람이 죽을 땐 하늘에서 별이 내렸다는 일화도 있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이야기. 그야 사람이 살든 죽든, 밤하늘에는 늘 별이 내린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만, 이 좁은 방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분명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무한대로 넓은 곳이겠지. 무수히 떠오르는 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지구의 생명 하나. 그런 사소한 것을 위해 밤하늘이 눈물까지 흘린다니, 거만하다. 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들 새가 살든 죽든, 계절은 반복된다. 다시 다음 겨울이 찾아온다.
도서실의 창문에서 보이는 나무들도 완전히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이 학원의 도서실은 춥다. 가을이 끝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방문하는 학생 수도 여실히 줄어드니, 온도의 변화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몸으로도 계절이 변해간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알게 된다.
오늘은, 몇 월 며칠일까. 학원제가 끝나고 벌써 꽤 지난 듯하기도 하고, 2학기도 반 이상 지났을 무렵 같은데.

한바탕 바람이 불고,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흩날려 하늘로 사라졌다. 희미하고 엷은 구름이 깔린 가 을 하늘로 울려 퍼지는 겨울의 발소리, 털갈이를 시작하는 새들.

모두, 무심하게 자동으로 반복될 뿐.

나도 그렇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서, 주위가 어떻더라도 같은 일만을 반복할 뿐, 그걸로 상관없었다. 정서를 수반하지 않는 잎이나 별로 남는다면, 그리 괴롭지도 않을 테니,

……오늘은 어딘가 이상하다. 있지도 않은 책 속 인간에게 신경질이 나 화풀이하다니.

왜 내 마음은 이렇게 술렁이는 걸까. 매일, 주야장천 잔잔하기만 했던 수면에 작은 돌이 던져진 기 분. 돌의 주인은 물론 그 시끄러운 사람. 오늘도 역시 나타날 것이다.

만나는 것이 기대된다던가, 그렇지는 않지만, 그 시끄러운 사람 때문에 이전의 나로서 있기 어려워져서, 하지만 그것이 왜인지 알 수 없어서, 석연치 않다.
오늘도 나는 막연히 불안을 품은 채 그 사람을 기다린다.

 

 

사카자키 유우야/밀회

깊은 밤의 찻집은 오늘도 북적인다. 폐점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도 사방에서 새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그럼, 간략히 말하지, 이번엔 이 자리에서 네가 결단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헤에, 뜬금없네요. 오네 씨. 미리 알려주었다면 멋들어진 명대사 하나라도 생각해 왔을 텐데."
오네 씨──아니, JB는 늘 이렇다.
중대한 사항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호출에는 대부분 갑작스러운 선택이 함께 따라온다.
"시로가네 르 벨 사쿠야의 성 피죠네이션 편입이 결정되었다."
"……에…?"
"뭘 멍하니 있나. 말했을 텐데, 이건 중요한 이야기다. 동생의 이름을 잊지는 않았겠지."
"……사쿠야는 남프랑스에 있을 텐데요."
"봄에 부친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매파 조직과 무언가 관계가?"
"현시점에서는 무관해 보인다. 프랑스 지부의 보고서도 확인했지만, 아무래도 부친 쪽 사정인 것 같
군."
"그렇습니까……"
그리운 이름이다. ……아니, 그리움뿐만이 아니야, 형용하기 어려운 흰 감정과 검은 감정, 양쪽이 섞여서 가라앉은 덩어리가, 마음 저 안쪽에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부러 저를 불러내서 전한다는 건, 제가 선택하도록 하고 싶다는 거죠? 그만둘지, 계속할지."
"아아, 그 말대로다. 이대로 학원에 남아 잠입 조사를 계속할지, 혹은 적절한 절차를 거쳐 봄과 함께 학원을 떠나, 새로운 임무에 돌입할지."

일반적으로, 첩보부원은 조사 대상의 혈연관계에 있는 새가 얽혀있는 임무에는 배치되지 않는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한없이 냉정해질 수 있는 구성원이라 해도, 극한의 상태에 놓이면 역시 「가족身内」이라는 존재가 약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 리스크가 동료를 위험에 노출하는 것이다.

"이 건에 대해서는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국장은 네게 결단을 맡긴다고 말했지. 자, 어떡할 건가?"
"……"

동생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학원에 찾아온다.
그곳에는 우연히도 천한 핏줄의 형이 있어, 재회한다. 그뿐. 그뿐인 이야기다. 그가 자신을 꺼린다는 점은,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학원이 「흑」이라 하더라도, 사쿠야가 나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면, 위험한 일에 처하지도 않겠지."
"계속할 거예요. 오네 씨. 저도 프로니까요."
"알겠다. 그럼 위에도 그렇게 전해두지, 만약을 위해 말해두지만, 아무쪼록—"
"알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접촉할 테니, 걱정 마시길."

 

 

이와미네 슈/누각이 사라진 날

처음에는, 소리였다. 낮고 일정하게, 조용한 진동음이 근처에서 들려온다. 무언가의 계측기 소리일까? 그리고, 누군가─아마 2, 3마리 정도겠지─가 분주하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걷는 기색, 소리뿐인 세계가, 며칠이나 지속됐다. 마치 끝나지 않는 밤 속에서 계속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그런 심정이었다.
다음으로, 무채색의 세계가 있었다. 하얀 천장에, 하얀 침대, 회색 기계, 회색 꽃, 회색 새. 이 눈을 맞이하러 온 것들은 모두 색이 없었다.

"눈을 떴니? 다행이다. 너는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 기본적인 것부터 확인해두자. 이름을 말해보렴."
"이름……"
대체 자신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기억의 실을 더듬어도, 부모에게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린 날은 언제였을까…….
"우츠로, ……이치죠 우츠로 입니다."
"흐음, 정신은 제대로 드는 모양이네. 우츠로 군은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니?"
"……아니오."
고개를 저으려다 알게 되었다.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 반신이 고정되어 있다. 하얀 천에 선명한 붉은 색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일 전의 일이야. 에이부즈 하이시티가 과격파 인류에게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어. 너는 이치죠 빌딩의 폭발에 말려들어서, 여기로 이송되었지. 기억 안 나니?"
"……기억나요. 괜찮습니다."
무엇을 하러 갔던 걸까.
아버지나 어머니가 불렀던 걸까. 어느 쪽이든, 그다지 관심 없는 용건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유감스럽지만, 요전 날 부모님의 사망이 확인되었단다. 네겐 여러 가지 할 말이 있어."
유감? 아니, 딱히 느껴지는 바는 없다.
지루한 이야기다. 부모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모두, 회색빛의 의사는 양친의 대를 잇기 위해 필요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전부터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이 집안에 태어나서는 안 되었다. 운명론 따위의 바보 같은 것이 아니다. 단지 간단한 사실로써, 부모는 이 몸을 꺼렸고, 이 기질에 낙담했다.
마침 좋은 기회다. 이름을 버리고, 전부 다시 시작하자. 부모가 쌓아온 재산도 지위도, 방치해두면 혈연의 새들이 마음대로 빼앗아 가겠지 기묘할 정도로 사고가 차갑게 식어 맑아진다. 허무함은 아니다. 인류를 향한 원망도 아니다. 그저, 귀찮은 가족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안심과 비슷한 온화함이 마음을 지배해갔다.


"……선생님,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니?"
"색이 보이지 않아요. 모든 것이, 회색이에요. 붉은색만은, 보입니다만."
"정말로? 그건 큰일이네, 색각 이상일지도 몰라. 네 몸은 너덜너덜했으니, 어떤 후유증이 남을지도
예상할 수 없단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원래대로 돌아가도록 함께 힘내자."
"……네."

 

 

히구레 앙헬/제1의 심판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모든 것을 거절하는 절대 영도. 순수하면서도 무자비한 백색의 빙주(氷柱)가 일대를 뒤덮으니, 이곳이 잊혀진 땅 저 밑바닥 절망의 감옥 코큐토스라는 것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밝다.
이 정적의 백색을 더럽히는 것이 단 하나. 부정(不淨)의 진홍─자신의 가슴에서 떨어지는 피다. 빙주에 봉인당한 나의 가슴은, 성스러운 창 사이클롬에 꿰뚫려 있다. 창의 무늬를 따라, 내 피가 얼음을 붉은색으로 물들여간다.

"……미안하다, 진홍의 타천사여.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고귀한 청색─이단심문관 에델브라우는 괴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 의복, 블루 이슈인페리얼 크로스는 조금 전 나와의 결전으로 무참히 더럽혀진 채다.

"너는 너의 숙명을 다한 것이다. 에델브라우, 마음 쓰지 마. 이것은 나의 죄 내가 짊어져야 할 업이다."

언젠가부터 나의 안에 자리 잡은 사악한 반신, 힘네시아. 아니…… 이 사악은 태어날 때부터 나와 함께였겠지. 단지 각성이 늦었을 뿐. 이 세상의 온갖 절망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양분 삼아 계속 성장하는 어둠은,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잠식해온 것이다.

나는, 자신의 의지로 타천(墮天)했다. 신의 성스러운 빛을 등지고, 암흑의 세계로 걸어가길 택했다. 후회는 없다. 하지만——

"너와 칼을 겨눠야만 한다는 것. 단지 그것만은, 후회하고 있다."
"......그런 말을"

안쪽 깊은 곳에 갇힌 진홍빛 사악의 기억.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나로서는 멈출 수 없다. 증오를 원천으로 한 힘은, 세계를 파멸로 이끌 때까지 멈추지 않겠지.
조금 전 에델브라우와의 결전도 그랬다.
내게는 전투가 한창일 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부수고자 하는, 그 충동이 이 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암마도사 바렌슈타인과 재회하지 못하고 잠드는 것은 분하지만, 이것도 숙명이란 것인가, 혹은, 다시 언젠가 새로운 심판의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 죄 깊은 영혼에도 시간을 넘어선 날개가 허락 된다면, 새롭게 태어나 다시 언젠가──

"진홍의 타천사여, 작별이다."
"아아."


학원의 상공에는 어두운 구름이 얇게 펼쳐져 있다. 아직 낮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주위가 어둡다. 폭풍을 예고하는 강한 바람 속에서, 한 마리의 루손 블리딩 하트가 옥상에 서 있었다.

"확실히 기척이 느껴져. 근처에 있는 건가? 에델브라우......!"